2012/04/28일 토요일 비룡산악회 48차 양평 부용산 산행에 참가하고 그 기록 영상을 아래에 정리했다. 이 중에는 설영형, 도봉산, 유리비 동문이 올린 영상도 담아다 그 일부를 군데군데 끼워 넣었다. 양해를 구하며 좋은 영상 올려주심에 감사드린다.
이날 산행의 부용산(芙蓉山)은 경기/양평군/양서면에 위치하는 366m의 산으로, 산이 푸르고 강물이 맑아 연당(蓮堂)에서 얼굴을 마주 쳐다보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부용(芙蓉)은 아욱목-아욱과의 낙엽활엽 소교목으로 꽃 모양과 색깔이 무궁화를 닮았다. 양귀비와 더불어 흔히 아름다운 여인에 비유되는 꽃이다. 영어로는 Cotton Rose이니 서양 사람들은 목화(木花)를 닮았다고 본 듯하다. 산 이름과 부용꽃과는 관련 있는 것 같지 않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본 부용산이란 이름의 산은 6∼7개 쯤 되는 것 같은데, 춘천의 882m봉이 가장 높고, 충주-음성에 644봉, 강진-장흥에 609봉, 그리고 양평의 부용산은 4위다. 이어서 의정부시의 211봉 등등...
그런데...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 192.6m의 부용산도 있다. 작곡자가 월북하고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고 하여 금기시돼, 작시자는 호주로 이민가야 했고 노래는 남도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불려졌던 부용산은 보성군 벌교읍에 있다. 그 사연을 본 기록 영상 말미에 정리해보았다.
상봉역에 모여 09:13분 발 중앙선 용문행 전철에 올라 11:50분경 신원역에 내렸다. 화창한 봄 토요일이라 전철 안은 나들이객으로 꽉 차, 등산용 난쟁이 의자에 앉아서 10개 역을 가느라 차창 밖 봄 풍경을 감상하는 여유로움도 즐길 수 없었다.
신원역에서 내려 점검한 동문 일행은 20명이었다. 10:08분 산행을 시작해 ‘묘골’ 신원1리와 ‘풀무골’ 신원2리를 지나 10:21분 부용산 입구 산길에 접어들었다. 도중에 ‘몽양기념관’이 있었다.
이날 서울 날씨는 아침 13.8°C였고, 낮에는 22.1°C를 기록했으며 쾌청한 날씨였는데, 여기도 비슷했을 것이다. 흙산에 소나무와 잡목들이 햇볕을 가려주어 알맞은 코스였지만 366m의 높지 않은 산인데도 가파른 길을 오를 때는 땀을 꽤 흘려야 했다.
길가에 노랑 개나리, 하얀 조팝나무, 빨강 철쭉 등이 봄이 한창임을 말해준다. 요즘 봄인지 여름인지 분간이 안 되는 날씨에 식물들은 곤혹스러울 것이다. 꽃을 피워야 되나 망설이다 보면 어느새 여름이니 열매나 제대로 맺을 수 있을까...???
10:50분 경 작은 봉우리에 당도해 5분여 동안 쉬며 다리를 풀고 나서, 이번에는 한참을 내려가다가 다시 가파른 길을 올라갔다. 더 힘이 들었다. 한두 번 또 쉬고 11:30분 경 부용산 정상에 올랐다. 가는 길가에 예쁜 '자주괴불주머니'가 눈에 띄었다.
정상석이 놓일 자리에는 엉뚱하게도 ‘부인당’이라 쓴 표지판이 높다랗게 꽂혀 있고, 부용산 정상석은 그 너머 헬기장 한쪽 바위에 놓여 있었다. ‘부인당’이라...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어디에서도 그 내력을 찾을 수 없었다.
조팝나무와 복사꽃이 정상석과 헬기장 주변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조팝나무 군락의 하얀 꽃타레가 울타리처럼 길게 늘어선 저 너머로는 658m 청계산인 듯한 봉우리가 거인처럼 서 있었다. 모두들 꽃 구경하는 가운데 카메라를 든 동문들은 꽃사진 찍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윽고 정상석 조금 너머에 자리를 마련하고 일행 20명이 모여 앉아 점심을 먹었다. 도시락에 김밥에 과일을 나누어 먹고, 막걸리 소주에 복분자주도 나와 들이키다 보니 곧 이어질 여정의 발걸음이 걱정스러워졌다. 자리를 파하니 12:05분.
정상석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정상 조금 아래 전망대 데크에 모였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이 곳에서의 전망은 말 그대로 ‘환상적’이었다. 부용산을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을...!!!
양수리 방향의 하산길 12:40분 경. 또 하나의 전망 데크가 326m 하계산 정상에 있었다. 여기서는 양수리 일대와 운길산이 보였으며, 왼쪽에 두물머리도 가물가물하게 보였다. 참 장관이었다.
하산 도중 나무숲속 길가에 쌓인 마른 솔잎 사이사이에는 양지꽃인 듯한 노랑꽃,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애기나리’도 보였다. 유리비가 올린 영상에는 ‘개별꽃’도 보이던데 어디서 찍었을까?
양수리에 내려와 하산을 끝내고 13:50분 경 ‘담천철교’ 아래 모였다. 여섯 동문은 따로 가고 14명이 양수역 부근 철로 밑을 지나 ‘용늪’가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지난해의 갈대꽃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새로 올라오는 연록의 풀잎이 마음을 상쾌하게 했으며, 애들을 데리고 나와 자연을 즐기는 젊은 부부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물가에 가라앉은 버려진 작은 배를 볼 때는 인생무상과 비교되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산행 뒤풀이는 14:40분부터 ‘예전’이라는 식당에서 가졌다. 식당의 길가 화단에는 연청색 매발톱과 하얀 돌단풍 꽃이 곱게 피어있었다. 14명 동문들이 6개 탁자에 나누어 앉아 녹두 빈대떡을 안주삼아 이곳 특산인 연근주를 마시고 산행을 회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식당을 나와 커피 한 잔씩 들고 나서 양수역으로 이동해 16:05분 경 중앙선 전철을 탔다. 돌아오는 전철도 나들이 인파로 만원이었다. 난쟁이 의자에 앉아 상봉역까지 와서 일행과 헤어진 후 귀가했다.
동문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항상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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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의 부용산과 그 이름이 같은 전남/보성군/벌교읍 부용산에 얽힌 애절한 시와 노래가 있어, 여기 그 사연을 정리해보았다.
◇부용산에 얽힌 애절한 노래
보성군 벌교읍에는 ‘부용산’(芙蓉山)이라는 192.6m의 작은 산이 있고, 산 중턱에는 ‘부용산’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시의 1절만 옮기면 다음과 같다.
부 용 산
박기동 시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박기동 시인은 1917/11/28일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났고 10살 되던 해 벌교로 이사했으며, 한의사였던 아버지 덕으로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4살에 일본에 유학해 중학교를 마치고 관서대학에 진학해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우리말의 중요성을 깨닫고 시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귀국해 1944년 벌교초등학교, 1946년 광주서석초교 및 벌교중학교를 거쳐 1947년 순천사범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시집간 누이가 이 해 폐결핵으로 죽자, 시댁 식구 몇 명과 함께 부용산 자락에 묻고 내려오면서 그의 애절한 마음을 시로 담아낸 것이다.
그는 1948년 2월 목포항도여중(현 목포여고 전신)으로 부임해 음악교사 안성현과 천재소녀 김정희를 만난다. 10월에 김정희가 폐결핵으로 요절하자 전교생이 슬퍼했는데, 안성현이 박기동의 시작노트 중에서 ‘부용산’을 보고 여기에 곡을 붙여 노래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부용산’ 노래는 학교 교정을 넘어 목포와 인근 지역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시가 만들어진 곳은 벌교이고 노래로 불리운 곳은 목포인 셈이다.
그러나 작곡자 안성현이 6·25 한국전쟁 때 무용가 최승희의 권유로 월북하고, 나중에 부용산 노래를 빨치산이 애창하고 민주화세력도 즐겨 부르면서, 노래 부르는 것은 금기시 되었으며, 박기동 시인은 기관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그는 교사도 그만두고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된다.
1980년대까지도 가택수사 등 감시와 얽매임을 받았던 그는 결국 한 많은 조국을 등지고 1993년 호주로 이민을 떠나게 된다.
부용산 노래가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안치환에 의해 음반으로 정식 발표되었고, 1998년 한국일보 김성우 논설위원이 그 사연을 소개하면서부터이다.
1999년 목포에서 부용산 살롱음악회가 열리고, 2000/10월에 벌교 부용산 오리길에 시비가 세워졌고, 2002/04월 목포여고 교정에 노래비가 세워졌으며, 방송에서도 다큐로 다뤄 부용산에 얽힌 사연들이 세상에 알려졌다.
부용산 노래의 2절은 1999년(?) 호주로 박기동 시인을 찾아간 연극인 김성옥이 제2절 작사를 제의하고 박 시인이 수락함으로써 나올 수 있었다. 2절은 다음과 같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벌교 부용산의 높이
인터넷 검색에서는 벌교 부용산의 해발 높이는 195m, 195.8m, 192m, 95m 등으로 차이가 심하다.
2012/05/01일 본인이 벌교읍사무소(061-850-8065)에 전화하여 확인을 요청했던 바, ‘해양산림팀’이 확인한 지적도 상의 해발 높이는 192.6m라고 알려왔다.
#박기동: 1917/11/28∼2005/05/09
1982년 부인(문행자)은 사망했고. 1993년 가족을 두고 호주 이민 후 시드니에 거주해왔다.
2002/05/20일 <부용산>이라는 이름으로 박기동 산문집이 발간이 되었는데, 그때 목포에서 몇몇 지인들이 모여서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박기동 선생도 잠시 귀국해 함께 참석, 그 자리에서 본인이 직접 부용산이라는 시를 낭송했고, 참석자들의 요청에 따라 직접 노래도 불렀다.
2004/09월 뇌경색이 악화돼 아들(치과의사)의 권유로 귀국하여 치료를 받아오다 2005/05/09일 수 88세로 사망하여 경기/마석 모란공원 묘원 내 아내 옆에 안장되었다.
#안성현(安聖鉉): 1920년∼2006/04/25
나주 출신으로, 함흥에서 자랐고 일본에 유학하여 동방음악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귀국한 뒤에는 전남 지역에서 음악 교사로 근무하며 작곡가로 활동했다.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동요 <엄마야 누나야>가 유명하며, 목포의 항도여중(목포여자고등학교의 전신)에서 교사로 근무할 때인 1948년에 동료 교사 박기동이 작사하고 안성현이 작곡한 <부용산>(芙蓉山)도 널리 불려졌다.
한국전쟁 중 월북했고, 북한의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으며 무용가 최승희의 남편 안막의 조카이기도 하다. 이들이 모두 월북하면서 이후 안성현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망 당시 북조선 <문학신문>의 부고 기사에 따르면 지휘자, 작곡가, 연구사로 일하며 민족음악 발전에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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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계절 좋은산행이엇읍니다.
부용산의유래와 역사적흐름속에 얼켜진
사연들 잘보앗읍니다.